高句麗侯의 정체
後漢書 東夷列傳에 漢 나라 武帝가 朝鮮을 멸망시키고 高句麗를 高句麗縣으로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傳
衛滿朝鮮이 멸망할 무렵 衛滿朝鮮의 西邊은 난하이고 衛滿朝鮮의 東邊은 遼河였다. 衛滿이 箕準으로부터 朝鮮을 빼앗았을 때에는 遼東半島도 朝鮮에 속했으나 그후 遼下 이동 遼東半島 지역은 고구려(일명 북부여)에 빼앗겼다. [참고 : 衛滿朝鮮의 영역은 어디인가?]
漢 나라는 B.C 108년에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난하 서쪽에는 樂浪郡 수개 縣을 설치하고, 전의 衛滿朝鮮 지역에는 行政機構인 辰番郡과 軍事機構인 臨屯郡을 설치하였고, 이어서 B.C 107년에 고구려(일명 북부여)로부터 遼下에서 單單大嶺(길림합달령+천산산맥 산줄기) 사이 橈東半島 지역을 빼앗아 行政機構인 樂浪郡과 軍事機構인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전 해에 난하 방면에 설치되었던 樂浪郡은 遼河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後漢書 문구를 살펴본다.
1. 漢 武帝가 朝鮮을 멸망시켰을 때는 아직 (고주몽)고구려는 건국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高句麗는 (고주몽)고구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주몽)고구려 이전에 고구려로 불린 일명 北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2. 高句麗를 縣으로 하였다는 것은 고구려(북부여) 전지역을 縣으로 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북부여)의 수도인 고구려(지금의 심양 방면)에 고구려현을 두었다는 뜻이다. 이곳은 한나라가 고구려 무리를 통치하는 중심지로서 그곳에는 한나라가 임명한 허수아비 고구려 통치자 高句麗侯를 두었다.
3. 한나라가 설치한 玄菟郡 高句麗縣은 고구려 무리를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중심지였다.[참고 : 玄菟郡 高句麗縣 위치]
그런데 三國史記 高句麗本紀나 漢書에는 高句麗縣에 高句麗侯를 두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瑠璃王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穢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31년 한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胡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지 않으려 하므로 강박하여 보내니, 모두 새 밖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이 추격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기를 "맥인들이 법을 위반하였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누르지 못한터에 다시 부여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 목을 베어 한나라 수도로 보내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先是 莽發高句驪兵 當伐胡 不欲行 郡強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為冠 遼西大尹田譚追擊之為所殺 州郡歸咎於高句驪侯騶 嚴尤奏言 貉人犯法 不從騶起 正有它心 宜令州郡且尉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畔 夫餘之屬必有和者 匈奴未克 夫餘穢貉復起 此大憂也 莽不尉安 穢貉遂反 詔尤擊之 尤誘高句驪侯騶至而斬焉 傳首長安 莽大說..중략.其更名高句驪為下句驪 佈告天下 令鹹知焉 於是 貉人愈犯邊 東北與西南夷皆亂雲」 漢書 卷九十九中 王莽傳第六十九中
위에 나오는 高句麗侯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부 사학도들은 고구려(북부여)와 (고주몽)고구려를 혼동하여 고주몽고구려왕을 高句麗侯로 착각하는 이가 있으나, (고주몽)고구려왕과 高句麗侯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高句麗侯는 고구려 일명 북부여 무리를 통제하기 위하여 한나라가 허수아비로 임명한 고구려(북부여) 무리 통치자이고, (고주몽)고구려왕은 B.C 58년 또는 B.C 37년에 건국된 독립국의 왕이다.
한나라는 B.C 108년에 衛滿朝鮮을 명망시키고 난하에서 遼河 사이 衛滿朝鮮 지역에 辰番郡과 臨屯郡, 樂浪郡을 설치하고, 이듬해 B.C 107년에 遼河에서 單單大嶺 사이 지역을 빼앗아 행정기구인 樂浪郡과 군사기구인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한나라는 B.C 107년에 遼河에서 單單大嶺 사이 지역에는 漢郡縣에 의한 지배체제와 玄菟郡의 무력을 바탕으로 하여 漢나라가 임명한 허수아비 고구려 무리 통치자 高句麗侯를 내세워 통치하는 2중 지배체제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玄菟郡 高句麗縣은 玄菟郡의 중심지이자 遼東 지역 전체의 중심지였다. 그 때문에 玄菟郡은 궤멸될 때마다 재건하였고, 고구려 무리를 막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 遼東郡의 縣을 차출하여 고구려 무리를 막는데 사용하였다.
앞에 나온 유리왕 31년조 문구를 보면, 新 王莽은 고구려(북부여)와 (고주몽)고구려 무리를 동원하여 胡를 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와 漢書 문구로 보아, 新 王莽은 高句麗侯와 (고주몽)고구려 장수 延丕에게 胡를 칠 군사를 내어놓으라고 하였고, 高句麗侯와 (고주몽)고구려 장수 延丕가 마지못하여 군사를 내어놓자 胡를 치는데 동원된 군사들은 塞를 벗어나 도망가 버렸다.
王莽은 討濊將軍 嚴尤의 주청을 듣지 않고 이들을 토벌하라고 하니 군현 내에 살고 있는 고구려 무리들이 가만히 앉아서 죽으려 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嚴尤는 이들을 토벌하고 아무 죄도 없는 고구려 무리 허수아비 통치자 高句麗侯와 고구려 장수 延丕의 목를 꾀어 수도로 보내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아 한군현과는 별개로 高句麗侯를 정점으로 한 고구려 무리 통치체제는 이때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고구려는 新 王莽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비록 허수아비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북부여) 무리의 통치자 高句麗侯가 죽으므로서 고구려(북부여) 무리들간의 大統 싸움에서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고주몽)고구려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나라의 요동지역 통치거점인 高句麗縣을 점령하고 이어서 東夫餘를 멸망시키므로서 분열된 고구려(북부여) 무리를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북부여)와 (고주몽)고구려를 구분하지 못하고, 고구려왕과 고구려후를 구분하지 못하면 위에 나온 유리왕 31년조, 33년조의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