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필자는 어떤 古記가 있을 경우 그 古記의 史料로서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책 전체를 일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古記에 적혀 있는 개개 문구별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럴 경우 개개 문구가 正史 문구와 충돌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 正史 문구와 충돌하더라도 다른 正史 문구와는 부합하는 경우 다른 여러 사료를 분석하여 그 古記 문구가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될 때만 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
강단사학자들은 桓檀古記나 揆園史話 모두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들어와 僞作한 것이므로 史料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들은 揆園史話나 桓檀古記는 僞作이 아니므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는 揆園史話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桓檀古記보다는 낮게 평가한다. 혹자는 필자에게 桓檀古記나 揆園史話 모두 僞書일 가능성이 많은데, 왜 사료로서의 가치에 차이를 두느냐고 묻는다.
아래에 필자가 왜 桓檀古記와 揆園史話의 사료로서의 가치에 차이를 두는지 설명한다.
揆園史話는 1675년(조선 숙종 2년)에 北崖老人이 쓴 책으로 序文, 肇判記, 太始記, 檀君記, 漫說 순서로 적혀 있다. 序文에는 著者가 산골짜기에서 淸平이 저술한 震域遺記를 참고하여 지었다고 적혀 있고, 肇判記에는 桓因이라는 一大主神이 天地를 개창하고, 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神政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太始記에는 桓儉 이전 桓雄의 역사가 적혀 있고, 檀君記에는 桓儉부터 古列加까지 47명 檀君과 그 재위기간 및 1,195년간의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으며, 漫說에는 儒學者들의 사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강단사학자들은 揆園史話는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僞書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 근거는 19세기 이전에는 揆園史話 原本이나 筆寫本이 등장하지 않았고,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점, 揆園史話나 그 저본인 震域遺記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眞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揆園史話의 일부 내용이 처음 인용된 것은 1925년 간행된 檀典要義를 통해서이지만, 檀典要義에 인용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1929년 간행된 大東史綱에서 인용되었고, 1940년에는 梁柱東이 筆寫本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뒤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北崖子의 원본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筆寫本을 구입하여 1972년에 貴重本으로 등록하였고,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심의의원인 李家源, 孫寶基, 任昌淳 3인이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으므로 眞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揆園史話 檀君記는 그 내용에 좀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檀君朝鮮의 역사에 대하여 桓檀古記 檀君世紀와 揆園史話 檀君記를 대비해 보면, 같은 점은 47명의 檀君 이름과 檀君朝鮮이 B.C 233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각 단군에 대한 일부 역사적 사실이고, 다른 점은 揆園史話에는 檀君朝鮮이 B.C 1139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는 반면에 桓檀古記 檀君世紀에는 B.C 238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다. 즉 揆園史話는 檀君朝鮮이 箕子 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桓檀古記 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檀君朝鮮의 역년과 揆園史話에 적혀 있는 檀君朝鮮의 역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에 모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세 王儉 단군에 관한 내용, 4세 烏斯丘 단군이 순시하다가 영초를 얻었다는 내용, 8세 于西翰 단군이 수확물에 대한 세금 비율을 정하였다는 내용(세율이 揆園史話에는 90분의 1, 檀君世紀에는 20분의 1), 10세 魯乙 단군 때 짐승을 우리에 넣어 길렀다는 내용, 15세 代音 단군이 수확물의 80분의 1로 세율을 바꾸었다는 내용, 23세 阿忽 단군이 동생 固弗加에게 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熊乫孫으로 하여금 殷나라를 南征하는 군사를 살펴보게 하였다는 내용, 30세 柰休 단군이 청구를 둘러 보고 奄瀆忽에 이르러 諸侯國의 汗을 만났다는 내용, 47세 高列加 단군 때 檀君朝鮮이 멸망했다는 내용 등등이다.
그렇다면 2 史書에 적혀 있는 檀君朝鮮의 역년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47명의 檀君 이름과 비록 檀君은 일치하지 않지만 같은 역사적 사실이 檀君記에 적혀 있을까?
이는 檀君世紀나 揆園史話를 짓기 이전에 존재한 底本 사료에 48명의 檀君 이름과 그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사서 모두 이 저본자료를 이용하여 사서를 만들면서 檀君世紀에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238년 사이에 적어 넣고, 揆園史話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1139년 사이에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로는 너무 빈약하니까 檀君世紀는 檀奇古史를 참조하여 각 檀君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고, 揆園史話는 震域遺記를 참조하여 각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두 사서 모두 중국의 사서 문구를 연도에 맞추어 인용해 놓았다.
그 결과 檀君世紀나 揆園史話에는 각 단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檀奇古史나 震域遺記에 적혀 있는 과장 또는 가필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桓檀古記 檀君世紀에는 어느 정도 과장 또는 가필된 내용이 들어 있을까?
桓檀古記 檀君世紀와 檀奇古史를 대비하면 계연수나 이유립은 북애노인이 지었다는 檀君世紀를 필사하면서 檀奇古史에서 전사된 문구 중 역사적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은 내용은 많이 걸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桓檀古記 檀君世紀에는 아직도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과장된 내용은 그 시대 문화발달 정도에 비추어 가려낼 수 있지만, 가필된 내용은 어느 것인지 가려낼 수 없다. 따라서 檀君世紀 문구는 다른 사서 문구와 비교 검토하여 개개 문구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揆園史話 문구는 어느 정도 과장 또는 가필된 내용이 들어 있을까?
揆園史話를 보면, 肇判記, 太始記에는 전승된 설화와 중국의 사서를 인용한 내용이 들어 있다. 전승된 說話가 주이기 때문에 신빙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揆園史話 檀君記는 신빙성에 좀 문제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檀君朝鮮의 역년과 箕子 東來 이후 존재하였다는 箕子朝鮮이 실존한 나라인지 여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揆園史話 檀君記는 檀君朝鮮이 箕子 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檀君朝鮮은 그 성격으로 나누면 前期, 中期, 後期로 나누어지고, 前期는 三國遺事에 적혀 있는 御國 1,500년(실제는 1,048년인데 약 1,050년을 1,500년으로 잘못 오기하였다.)이다. 그리고 中期檀君朝鮮은 壽命 1,908년에서 御國 1,048년을 뺀 860년이다. 後期檀君朝鮮은 壽命 1,908년부터 檀君朝鮮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일어날 때까지 大夫餘 시대 188년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서에는 檀君朝鮮의 역년을 1,048년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1,048년은 桓檀古記 檀君世紀에 의하면 왕검 단군부터 소태 단군까지 전기檀君朝鮮의 역년이다. 이 견해는 왕검이 세운 前期檀君朝鮮을 색불루 단군이 무력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前期檀君朝鮮과 中期檀君朝鮮을 별개의 나라로 본 것이다. 이는 檀君朝鮮의 혈통이 바뀌었으므로 같은 나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고려 때 지어진 三國遺事에는 箕子 東來 이후에도 檀君朝鮮이 존재하였다고 적혀 있고, 北夫餘紀에는 解慕漱가 일어났을 때 檀君朝鮮이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解慕漱가 일어난 해는 B.C 239년이므로, 北夫餘紀에 의하면 檀君朝鮮은 B.C 239년경까지 존속하였다. 삼국유사에는 箕子 東來 후 檀君朝鮮과 箕子朝鮮이 병존하였다고 적혀 있다.
三國遺事나 北夫餘紀에 의하면 檀君朝鮮은 箕子 東來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런데도 揆園史話 檀君記에는 왜 檀君朝鮮이 箕子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을까?
아직 사대주의 사상이 강하기 전인 고려말 이전에 지은 책들은 檀君朝鮮의 역년이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삼국유사) 또는 2,096년(檀君世紀)으로 적었다. 그러나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 지은 책들은 조선을 小中華라 칭하면서 檀君朝鮮의 역년을 箕子東來 이전으로 임의로 확 줄여 버리고, 조선은 기자 동래 이후부터 중국왕조의 侯國이 되어 중국왕조의 교화를 받은 나라로 적었다.
揆園史話 저자도 檀君記를 지으면서 당시 조선시대 시류의 영향을 받아 檀君朝鮮의 역년을 원래의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 또는 2,096년으로 적지 않고 기자 동래 이전에 멸망한 것처럼 檀君朝鮮의 역년을 확 줄이고, 그 역년 안에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47명의 檀君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집어 넣어 놓았다. 揆園史話에 의할 경우 檀君朝鮮은 箕子東來 이전에 멸망하였고, 그 이후 존재한 조선은 檀君朝鮮이 아니라 周 나라의 侯國인 조선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