加耶國 존속시기
사서에는 "加耶" 또는 "加羅" 라고 불린 나라가 나오는데, 사서에 따라 한자가 조금씩 다르다. 가장 많이 쓰인 한자는 加羅, 加耶, 伽倻, 伽耶이고 그 외 駕洛, 狗邪, 拘邪, 伽羅, 迦羅, 呵라, 枷羅, 加良, 伽落, 狗邪 등이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加耶 명칭은 三國志 倭人傳에 나오는 狗邪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 금관가야, 고녕가야, 비화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에 관한 내용이 짦막하게 적혀 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다. 시조 이진아시왕<또는 내진주지라고도 하였다.> 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모두 16세 520년이었다. 진흥대왕이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만들었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2현을 거느렸다. 야로현은 본래 적화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신복현은 본래 가시혜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 어디인지 자상치 않다. 高靈郡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시王一云內珍朱智至道設智王 凡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冶爐縣 本赤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新復縣 本加尸兮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김해 소경은 옛날의 금관국<또는가락국 또는 가야라고도 하였다.>이다.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대손 구해왕에 이르러,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그 땅을 금관군으로 만들었다. 문무왕 20년에 소경을 만들었다. 경덕왕 때 김해경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금주이다. 金海小京 古金官國一云伽落國 一云伽耶 自始祖首露王至十世仇亥王 以梁中大通四年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 以其地爲金官郡 文武王二十年永隆元年爲小京 景德王改名金海京 今金州」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이다.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또는 고릉현이라고도 하였다.>으로 만들었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함녕군이다. 3현을 거느렸다. 가선현은 본래 가해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가은현이다. 관산현은 본래 관현<또는 관문현이라고도 하였다.>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문경현이다. 호계현은 본래 호측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 爲古冬攬郡一云古陵縣景德王改名 今咸寧郡 領縣三 嘉善縣 本加害縣 景德王改名 今加恩縣 冠山縣 本冠縣一云冠文縣 景德王改名 今聞慶縣 虎溪縣 本虎側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화왕군은 본래 비자화군<또는 비사벌이라고도 하였다.>이다. 진흥왕 16년(555)에 주를 설치하고 이름을 하주(下州)라 하였다가, 26년(565년)에 주를 철폐하였다.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이다. 지금의 창녕군이다. 1현을 거느렸다. 현효현은 본래 추량화현<또는 삼량화라고도 하였다.>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현풍현이다.火王郡 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 名下州 二十六年 州廢 景德王改名 今昌寧郡 領縣一 玄驍縣 本推良火縣一云三良火 景德王改名 今玄풍縣」
「고성군은 본래 고자군(古自郡)이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3현을 거느렸다. 문화량현(蚊火良縣)은 지금 어디인지 미상이다. 사수현은 본래 사물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사주(泗州)이다. 상선현은 본래 일선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영선현이다. 固城郡 本古自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蚊火良縣 今未詳 泗水縣 本史勿縣 景德王改名 今泗州 尙善縣 本一善縣 景德王改名 今永善縣」
「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을 일으켜 아시라국(阿尸良國)<또는 阿那加耶라고도 하였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2현을 거느렸다. 현무현은 본래 소삼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소삼부곡이다. 의녕현은 본래 장함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咸安郡 法興王以大兵 滅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以其地爲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玄武縣 本召삼縣 景德王改名 今召삼部曲 宜寧縣 本獐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성산군은 본래 일리군(一利郡)<또는 里山郡이라고도 하였다.>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가리현이다. 4현을 거느렸다. 수동현은 본래 사동화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 어디인지 미상이다. 계자현은 본래 대목현인데, 경덕돵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약목현이다. 신안현은 본래 본피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경산부이다. 도산현은 본래 적산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 어디인지 미상이다. 星山郡 本一利郡一云里山郡 景德王改名 今加利縣 領縣四 壽同縣 本斯同火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谿子縣 本大木縣 景德王改名 今若木縣 新安縣 本本彼縣 景德王改名 今京山府 都山縣 本狄山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三國史記 卷三十四 雜志 第三 地里一
위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금관가야는 수로왕의 10대손 구해왕(삼국사기의 구형왕) 때인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멸망했고, 고령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또는 내진주지라고도 하였다.> 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모두 16세 520년 동안 존속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시조 수로왕부터 10대 구형왕까지 왕계가 적혀 있다. 그러나 다른 가야는 왕계가 적혀 있지 않고, 고령가야는 아주 개괄적으로 적혀 있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에 완전한 왕계가 적혀 있는 것은 금관가야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삼국유사에 나오는 5가야 문구와 가락국기 문구를 살펴본다.
「가락기 찬을 상고하건데, 자색 끈 한 가닥이 하늘에서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내렸는데, 5개는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5개는 각기 5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금관은 5의 숫자에 넣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의 사략에는 금관까지 그 숫자에 아울러 넣고 창녕을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가야(혹 "羅"를 "耶"로 쓰기도 한다. 지금의 함안이다), 고령가야(지금의 함녕이다). 대가야(지금의 고령이다), 성산가야(지금의 경산이다. 혹은 벽진이라고도 한다), 소가야(지금의 고성이다)이다. 또 본조의 사략에는 이르기를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김해부가 되었다), 둘째 고령(가리현이 되었다), 셋째 비화(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 싶다),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성산은 혹은 벽진가야라 한다)이다." 하였다. 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茲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而濫記昌寧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恐高靈之訛) 餘二阿羅, 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三國遺史 第一卷 紀異 一 五伽耶
「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 계浴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 呼喚衆庶 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 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爾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踊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而歌舞 未幾 仰而觀之 唯紫繩 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裏著 抱持 而歸乃我刀家 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 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 則殷之天乙 顔如龍焉 則漢之高祖 眉之八彩 則有唐之高 眼之重瞳 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路 或云首陵 [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 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중략- - 一日上語臣下曰 九干等 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 皆是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職位之稱 당化外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刀爲五常 留水 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宇 留功 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鷄林職儀 置角干 阿叱干 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判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新 設官分職之道歟 於是乎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況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 日之有月 陽之有陰 其功也 塗山翼夏 唐媛興嬌 頻年有夢 得熊비之兆 誕生太子居登公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 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纜渡頭村 曰主浦村 解陵袴高岡曰 綾峴 천旗行入海涯曰 旗出邊 臣泉府卿申輔 宗正監趙匡等 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 而皆抛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子生 唯抱懷士之悲 皆首丘而沒 所舍賓館 圓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조落 壽一百五十八歲矣 개벽한 후 이 땅에는 나라의 호칭이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역시 없었는데, 이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어 추장으로서 백성을 총괄해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 7만 5천명이었다. 스스로 산야에 도읍하고 우물을 파 마시고 농사를 지어 먹었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에서 수상한 소리가 있어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았으므로 2-3백명이 이곳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으나 그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색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새끼줄 아래를 살펴보자 홍색 보자기로 싼 금합이 있으므로 열어 보니 황김 알 6개가 있는데, 둥글기가 해와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배하고 얼마 후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다 두고 그 무리가 각기 흩어졌다. 12일이 지나 이튿날 새벽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여니 여섯 개의 알이 동자로 변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했으므로 그들을 상에 앉히고 배하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날마다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 되니, 이는 은나라의 천을 같고 얼굴은 용으로 한의 고조요 눈썹의 여덟 색채는 요 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인 것은 순 임금과 같았는데, 그 달 보름에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를 수로라 하였는데, 혹은 수릉(수릉은 죽은 후 시호이다)이라고도 하고,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하니, 바로 6가야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돌아가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요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 -중략- -
하루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9간들은 모두 서료의 장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상스럽고 야만스러운 호칭이어서 결코 관원의 직위 칭호라고 할 수 없소. 혹시라도 밖에 전해져 들린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하고는 드디어 아도를 아궁으로, 여도를 여해로, 피도를 피장으로, 오도를 오상으로 고쳤으며, 유수, 유천이란 명칭은 윗 글자는 고치지 않고 아랫 글자만 고쳐 유공, 유덕으로 하였다. 또 신천은 신도로 고치고, 오천은 오능으로 고쳤으며, 신귀는 음은 고치지 않고 훈만 고쳐 신귀로 하였다. 계림의 직의를 취해 각간, 아질간, 급간의 작질을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나라의 제도와 한나라의 제도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는 옛 것을 개혁하여 새로 관을 설치하고 직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에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였는데, 그 교화함이 엄숙하지 않았으나 위엄이 있고, 그 정사가 엄하지 않았으나 잘 다스려졌으니, 하물며 왕이 황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비유할 수 있었다. 그 공열은 도산씨가 하나라를 보필하고 당원이 교씨를 흥하게 함과 같았다. 그해 꿈에 웅비의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후한 영제 중평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수(壽)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하여 처음 와서 육지에 내렸던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부르고 비단옷을 벗어서 던지던 높은 언덕을 능현이라 하였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 하였다. 잉신이던 천부경 신보와 종정감 조광 등은 나라에 도착한 후 30년 만에.각기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가 12년 뒤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하인들은 온지 7,8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오직 고국을 그리워하는 슬품을 지닌 채 고향을 향하고 죽었으며, 살던 빈관이 텅 비어 사람이 없게 되었다. 왕이 매양 고침에 의지하여 비탄에 젖곤 하다가 10년이 지난 헌제 건안 4년 기묘 3월 23일에 죽으니 수(壽)는 158세였다.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立安四年己卯三月十三日卽位 治三十九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云 姓金氏 盖國世祖 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年 永平元年五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年 義熙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坐知王 一云金叱 義熙三年卽位 娶傭女以女黨爲官 國內擾亂 鷄林國以謀欲伐 有一臣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亦含羽 況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悔 朋至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빈傭女 貶於荷山島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 生子吹希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 질知 질知王一云 金질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王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거등왕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건안 4년 기묘 3월 1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 5년 계유 9월 17일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으로서 태자 마품을 낳았다. 개황력에 이르기를 "성은 김씨로 대개 가야국의 세조가 금란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을 성으로 삼았다" 하였다.
마품왕 혹은 마품이라 하며 김씨로서 가평 5년 계유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영평 원년 신해 1월 29일에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 조광의 손녀 호구로서 태자 거질미를 낳았다. 거질미왕 혹은 금물이라고 하며 김씨로서,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고, 영화 2년 병오 7월 8일에 죽었다. 왕비는 아간 아궁의 손녀 아지로서 왕자 이품을 낳았다.
이시품왕 김씨로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 3년 정미 4월 10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 극충의 딸인 정신으로, 왕자 좌지를 낳았다. 좌지왕 혹은 김질이라 하는데, 의희 3년에 즉위하여 용녀와 결혼한 후 그 여자의 당에게 벼슬을 줌으로써 국내가 소란해졌다. 계림국이 모책을 써서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박원도라는 한 신하가 있어 간하기를 "하찮은 풀이라도 역시 우충을 포섭하거늘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되겠습니까? 또 복사가 점을 쳐서 해괘를 얻었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解而悔(해이회) 朋至斯孚(붕지사부)'라 하였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보소서" 하자 왕이 좋다 하고 사례하였다. 그리고는 용녀를 물리쳐 하산도로 내쫓고 그 정사를 고쳐 오랫동안 행함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15년을 다스리고 영초 2년 신유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대아간 도령의 딸 복수로서 아들 취희를 낳았다.
취희왕 혹은 질가라 하며 김씨로서,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을 다스리고 원가 28년 신묘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진사의 딸 인덕으로 왕자 질지를 낳았다. 질지왕 혹은 금질왕이라 하는데, 원가 28년에 즉위하여 이듬해 세조와 허황옥 왕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왕후가 합어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라 하고, 전답 10결을 내어 충당했다. 42년을 다스리고 영명 10년 임신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간 김상의 딸 방원으로 왕자 겸지를 낳았다.
겸지왕 혹은 김겸왕이라 하는데,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리고 정광 2년 신축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출충의 딸 숙으로 왕자 구형을 낳았다.
구형왕 김씨로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는데, 보정 2년 임오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므로 왕이 친히 군졸을 거느리고 나가 막았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 탈지이질금을 보내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 졸지공 등과 함께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중략..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 건무 18년 임인에서부터 구형왕 말 임자년까지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나라 보정 2년 임오이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이제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왕계가 완전히 적혀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누가, 언제 지었고, 신빙성은 어느 정도일까?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고려 文宗朝(A.D 1047-1082년) 大康年間에 金官知州事 文人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지었고, 삼국유사는 1285년경 지었으니, 가락국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1-2백년 앞서 지어졌다.
가락국기 내용을 보면 금관지주사인 성명불상 문인은 가락국기를 지으면서 금관가야을 상당히 미화해 놓았다. 그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가락국기 내용에서 나온다.
가락국기에 적혀 있는 수로왕의 壽는 158세이다. 이는 김수로왕 자연인의 壽가 158세라는 뜻이 아니고 수로왕계 금관가야의 壽가 158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금관지주사는 옛 사료에 수로왕의 壽가 158세라고 나오자 가락국기를 지으면서 마치 수로왕 개인의 壽가 158세인 것처럼 적었다. 가락국기 문구를 분석하면 초기 금관가야는 A.D 201년(44+158-1)RUD까지 존속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奈解尼師今 6년조에 新羅와 加耶가 강화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뒤 奈解尼師今 14년(A.D 209년) 가을 7월조에 포상8국이 가라국을 침범하여 가야국의 왕자가 신라에 와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는 태자 우노와 이벌찬 이음을 시켜 육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가야국을 구원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학자들은 신라에 구원을 청한 가야국을 아라가야로 보고 있는데, 만약 A.D 201년 이후에 전기 가야연맹의 종주국인 금관가야가 존속하였다면 6가야 연맹에 속한 아라가야가 금관가야의 적국인 신라와 강화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신라가 금관가야 서쪽에 있는 함안 방면의 아라가야가를 구원하러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금관가야는 A.D 201년경에 멸망하였고,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아라가야는 나라의 보존을 위하여 금관가야가 멸망한 그 해 신라와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내해이사금 6년(A.D 201년) 봄 2월 가야(註 아라가야)와 강화하였다. 六年 春二月 加耶國請和」
그런데 가락국기에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적혀 있는 구형왕은 전 금관가야국(A.D 44-201년)의 왕이 아니고 후 금관가야국(A.D 479 - 532년)의 왕이다. 신라 30대 법민왕(법흥왕) 용삭 원년 신유 3월에 내린 조서에 "가야국 元君(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본국에 항복할 때..운운" 문구가 나오는 데,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한 해는 A.D 532년이고, 구형왕은 김수로왕의 9대손이다. 가락국기에는 元君이 김수로왕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후대에 가락국기를 지으면서 가락국 왕통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전 금관가야국과 후 금관가야국을 하나의 금관가야국으로 통합하고 전 금관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을 후 통합 가야국의 시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후 금관가야국은 별개의 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본기에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삼국유사 구형왕)가 A.D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적혀 있다.
「법흥왕 19년(A.D 532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비 및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 항복하니 왕은 예를 다하여 대접하고 상등의 위를 제수하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또 후기 금관가야가 멸망한 해는 A.D 532년인데도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멸망연도가 마치 保定 2년(562년) 임오 9월로 적혀 있다. A.D 562년은 금관가야가 멸망한 해가 아니고 고령가야가 멸망한 해이다. 이는 금관가야를 미화하기 위하여 고령가야 멸망연도를 금관가야의 멸망연도로 바꾸어 존속기간을 늘린 것이다. 즉 가락국기를 지은 金官知州事 文人은 전 금관가야가 201년에 멸망하였고, 후 금관가야는 A.D 479년부터 532년까지 존속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가락국기에는 금관가야가 마치 A.D 42년부터 532년(또는 562년)까지 계속 존속한 것처럼 적어 놓았다. 신라에 항복한 후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은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전 금관가야의 왕이 아니라 A.D 479년부터 계속된 후 금관가야 시조 원군(元君)의 9대손이다.
아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적혀 있는 10명의 가야왕 중 김수로왕은 전기 금관가야 왕이고, 구형왕은 후기 금관가야 왕이나, 나머지 왕은 전기 금관가야 왕인지? 아니면 후기 금관가야 왕인지? 아니면 창작인지? 불분명하다.
가락국기에 적혀 있는 가라왕계
김수로왕(金首路王) 건무(建武) 18년(A.D 42년) 즉위 158년 재위
거등왕(居登王) 건안(建安) 4년(A.D 199년) 즉위 55년 재위
마품왕(麻品王) 가평(嘉平) 5년(A.D 253년) 즉위 39년 재위
거질미왕(居叱彌王) 영평(永平) 원년(A.D 291년) 즉위 56년 재위
이시품왕(伊尸品王) 영화(永和) 2년(A.D 346년) 즉위 62년 재위
좌지왕(坐知王) 의희(義熙) 3년(A.D 407년) 즉위 15년 재위
취희왕(吹希王) 영초(永初) 2년(A.D 421년) 즉위 31년 재위
질지왕(질知王) 원가(元嘉) 28년(A.D 451년) 즉위 42년 재위
겸지왕(鉗知王) 영명(永明) 10년(A.D 492년) 즉위 30년 재위
구형왕(仇衡王) 정광(正光) 2년(A.D 521년) 즉위 42년 재위
가야국에 대하여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가야국에 관한 내용을 살펴본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21년(A.D 77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와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길문으로 파진찬을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二十一年 秋八月 阿飡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飡 賞功也」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8년(A.D 87년) 가을 7월 영을 내려 "부덕한 이 몸이 이 나라를 맡았다. 서쪽으로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와 접근한데, 덕으로 무마하지 못하고 위엄으로 무섭게도 못하니 마땅히 성루를 튼튼히 하여 적의 침범에 대비토록 하라" 하였다. 이 달에 가소, 마두 두 성을 쌓았다. 八年 秋七月 下令曰 "朕以不德 有此國家 西인百濟 南接加耶 德不能綏 威不足畏 宜繕葺城壘 以待侵일" 是月 築加召馬頭二城」
「파사이사금 15년(A.D 94년) 봄 2월 가야적이 마두성을 포위하므로 아찬 길원을 시켜 기병을 1천명을 거느리고 가 쳐 물리쳤다. 가을 8월 알천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飡吉元 將騎一千擊走之 秋八月 閱兵於閼川」
「파사이사금 17년(A.D 96년) 9월 가야 사람이 남변을 습격하므로 가성주 장세를 보내어 막아내게 하였는데, 적에게 죽임을 당하니 왕은 노하여 용사 5천을 인솔하고 나가 싸워 무너뜨리고 노획을 많이 하였다. . 十七年 秋七月 暴風自南 拔金城南大樹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拒之 爲賊所殺 王怒率勇士五千 出戰敗之 虜獲甚多」
「파사이사금 18년(A.D 97년) 봄 정월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치려 하다가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이내 중지하였다. 十八年 春正月 擧兵欲伐加耶 其國主遣使請罪 乃止」
「파사이사금 23년(A.D 102년) 가을 8월 음즙벌국(註 안강)이 실직곡국(註 삼척)과 경계를 다투어 왕에게 찾아와 판결해 줄 것을 요청하니 왕은 난처하게 여긴 나머지 금관국의 수로왕이 노숙한 나이라 지식이 많으려니 생각하고 불러 문의하니 수로왕이 의견을 내세워 다투던 그 땅을 음즙벌국에 소속케 하였다. 이에 왕은 6부에 명하여 수로왕을 대접하게 하니 5부는 다 이찬을 주(主)로 삼고 오직 한지부만이 지위 낮은 자를 주(主)로 삼으므로, 수로왕은 성내어 노비 탐하리를 시켜 한지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 노비가 도망하여 음즙벌국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고 있으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내 놓으라고 하였는데 보내주지 않으므로, 왕은 성내의 군사로써 음즙벌국을 치니 그 主가 군중과 더불어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 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하였다.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飡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타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4년(A.D 115년) 봄 2월 가야가 남쪽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 왕은 친히 가야를 치기 위하여 보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註 양산군 원동에서 낙동강 하구까지 낙동강하류)를 지나가는데, 가야 사람들이 미리 숲속에 복병하고 기다렸다. 왕은 모르고 곧장 나가니 복병이 발동하여 여러 겹으로 에워싸므로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들이쳐 포위를 뚫고 나아갔다.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지마이사금 5년(A.D 116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어 가야를 침범케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뒤를 댔으나 가야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때마침 비마저 오래 내리어 이에 환군하였다.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城固守 會久雨 乃還」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6년(A.D 201년) 봄 2월 가야(註 아라가야)와 강화하였다. 六年 春二月 加耶國請和」
「내해이사금 13년(A.D 208년) 봄 2월 서방의 군.읍을 순시하고 열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飡利音 將兵拒之」
「내해이사금 14년(A.D 209년) 가을 7월 포상8국이 공모하여 (아라)가라국을 침범하니 (아라)가라국의 왕자가 와 구원을 요청하므로 왕은 태자 우노와 이벌찬 이음을 시켜 육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쳐 죽이고 포로 되었던 6천명을 탈환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註 이때부터 가야와 신라가 싸우는 내용이 한동안 나오지 않고 구태백제(신라본기에는 "倭"로 비하되어 적혀 있다)와 신라가 싸우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경상도 지방의 가야국 중 함안의 아라가야를 제외한 가야국이 구태백제에 평정되었기 때문이다.]
「내해니사금(奈解尼師今) 17년(A.D 212년) 봄 3월 (아라)가야가 왕자를 보내어 인질로 잡혔다.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夏五月 大雨 漂毁民屋 」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3년(A.D 481년) 봄 3월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북변을 침략하여 호명(註 영덕 지품)을 비롯한 7개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註 흥해)로 진군하므로 우리 군사는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더불어 길을 나눠 방어하니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추격하여 니하의 서쪽에서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三年 春..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 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위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전 가야국은 A.D 212년을 마지막으로 나타나지 않고, A.D 481년에 후 가야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남제서에는 A.D 479년에 가라왕 아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낸 내용이 나온다. 즉 후 금관가야에 관한 내용은 임나연정이 멸망한 A.D 479년부터 나온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먼곳에서 처음으로 사신이 온 것을 보니 멀리 떨어진 오랑케에게도 (皇恩이) 미쳤다. 가라왕 하지는 바다 밖 동쪽 먼 곳에서 (사신을 보내) 관문을 두드리고 공물을 바쳤다. 보국장군 가라왕을 제수할만하다.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 本國王」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 加羅國傳
전 가야국이 왜 A.D 212년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사라졌는지 이해하기 위하여 앞에 나온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2년조를 살펴보면, 그 내용에는 신라의 西方을 倭人들이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이 무렵 왜인들이 이미 가야 지방을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해에는 阿羅加耶가 주변국들의 공격을 받았고, 신라의 6부 군사들이 이를 구원하였다.
그 뒤 A.D 212년에 아라가야가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인질로 잡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가야에 관한 기록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 무렵 阿羅加耶마저 왜인에게 점령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가야지방을 점령한 倭人의 정체는 무엇일까?
日本書紀에 의하면 이 시기 가야지방을 점령한 왜인은 仇台百濟가 거느린 백제 군사와 야마대연맹 합동군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한반도 백제와 가야 지방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와 중국 正史 문구를 살펴본다.
「북사 및 수서에도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요동태수 공손탁이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為東夷強國.」 北史 列傳第八十二 百濟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차츰 강성해져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為東夷強國.」隋書 列傳第四十六 百濟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내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이 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 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三國志 魏志 東夷傳 卷30 夫餘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 隋書, 北史 등에는 公孫度의 딸로 적혀 있고, 삼국지 부여전에는 공손탁의 宗女로 적혀 있다.]
장춘 방면의 夫餘王 尉仇台는 A.D 204년 10월에 公孫康이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帶方郡으로 이동하여 仇台百濟를 세우고 A.D 205년에 溫祚百濟와 益山 金馬 馬韓을 정복하고 이어서 A.D 205 - 208년경에 邪馬臺聯盟을 복속시켰으며, A.D 208년경에 百濟.야마대연맹 군사들과 같이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받았다. 이때 구태백제에 평정된 가야국들은 새로운 왕통으로 변하였다.
구태백제는 초고왕(?~214년) 시기에 邪馬臺國 여왕 神功皇后에게 사신을 보내어 야마대국과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야마대국 군사와 함께 가야 지방을 점령하여 그 땅을 백제가 가졌다.
「신공황후(神功皇后) 46년(일본서기년도는 A.D 246년, 실제년도 A.D 205-208년경) 사마숙니(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냈다. 탁순왕 말금한지(末錦旱岐)는 사마숙니(斯摩宿禰)에게 고하여 "갑자년 7월 중순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의 3인이 우리 땅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 있다는 것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그 귀국에 가게 하였습니다. 고로 길을 찾아서 그 나라에 가고자 합니다. 만일 신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하게 하시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주의 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구저들에 말하여, '이전부터 동쪽에 귀국(貴國)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가보지 않아서 그 길을 모른다. 다만 바다가 멀고 풍랑(風浪)이 심하다. 큰 배에 타야만 갈 수 있을 것이다. 항구가 있더라도 어찌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구저(久氐)들이 '그러면 지금 당장은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선박을 준비하고 나중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만일 귀국의 사인이 온다면 꼭 우리나라에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고 돌아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사마숙니는 종자인 이파이(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초고왕은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四六年春三月乙亥朔 遣斯摩宿禰于卓淳國 [斯麻宿禰者 不知何姓人也] 於是 卓淳王末錦旱岐 告斯摩宿禰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 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以至于斯土 若能敎臣等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時謂久氐等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即當今不得通也 不若 更還之備船舶 而後通矣 仍曰 若有貴國使人來 必應告吾國 如此乃還 爰斯摩宿禰即以傔人爾波移與卓淳人過古二人 遣于百濟國 慰勞其王 時百濟肖古王 深之歡喜 而厚遇焉」
백제와 야마대국이 통교하면서 백제는 父兄의 나라, 아마대국은 子弟의 나라가 되었다.
「흠명천황 2년(A.D 541년) 여름 4월, 안라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와 졸마(卒麻)의 한지(旱岐)와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사이기( 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길비신과 백제에 가서 같이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이 임나의 한지들에게 “일본의 천황이 내린 조칙은 오르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재건할 것인가.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펼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중략..성명왕이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 때 안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 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註 위 문구를 보면, 신공황후는 백제 초고왕 때부터 백제와 교류하였다. 그리고 속고왕은 초고왕을, 귀수왕은 구수왕을 각 가리키고, 자제의 나라는 복속국을 뜻한다. 이를 보면 왜국은 초고왕, 구수왕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으로 섬겼다.]
백제와 야마대국 합동군은 가야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사실이 일본서기에는 A.D 249년조에 적혀 있으나 초고왕 때 일어난 일이므로, 이 사실은 A.D 214년 이전에 있었다.
「신공황후 49년 황전별(荒田別)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久氐)들과 같이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때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칠 수 없다. 다시 사백(沙白)과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증가할 것을 청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 [이 두 사람은 성을 알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과 개로와 함께 가게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훼국(喙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한 후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가서 남만의 침미다례를 무찔렀다.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四九年春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 奉上沙白・蓋盧 請増軍士 即命木羅斤資・沙沙奴跪 [是二人 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盖盧共遣之 倶集于卓淳 撃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火本・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 自然降服」
가야 지역이 백제, 왜 연합군에게 점령당하므로서 가야 지방은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3년조와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이다. 이후 가야에 관한 내용은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이 무렵 각 가야국들은 백제의 통제를 받았고 대외적으로 독립된 외교행위를 하지 못하였다.
백제의 통제를 받던 加耶國들은 A.D 396년 광개토왕의 백제정벌 때 백제가 패함으로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이에 관한 내용이 日本書紀 應神天皇 8년조에 나온다.
「응신천황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註 제주도), 현남, 지침(충청도 지방), 곡나(황해도 지방), 동한(가야 지방)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日本書紀
이후 가야 지방은 A.D 479년까지 광개토왕이 설치한 任那聯政의 통제를 받다가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되었을 때 독립세력이 되었다.
- 흥(興)이 죽고 아우 무(武)가 서자 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다. (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書
- 승명 2년(478년) 무(武)에게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였다. (順帝昇明二年遣使上表曰..중략..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宋書
- 건원 원년(479년) 새로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고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 南齊書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되었을 때 고령가야는 백제의 주선으로 사신을 南齊에 보내어 補國將軍 本國王 관작을 받았다. 이는 고령가야가 중국왕조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먼곳에서 처음으로 사신이 온 것을 보니 멀리 떨어진 오랑케에게도 (皇恩이) 미쳤다. 가라왕 하지는 바다 밖 동쪽 먼 곳에서 (사신을 보내) 관문을 두드리고 공물을 바쳤다. 보국장군 본국왕을 제수할만하다.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 本國王」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 加羅國傳
위 내용은 A.D 479년 임나연정이 와해되어 가야국이 독립세력이 되었을 때 백제는 武力과 南齊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고령가야를 남제에 조공케 함으로서 가야를 백제의 세력권에 끌어들인 것을 적은 것이다.
이 때부터 후 가야국이 시작되었다.
그후 A.D 502-503년에 백제가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여 국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가야지방으로 진출하여 가야국들을 하나씩 하나씩 병합해 나갔다.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A.D 514년) 봄 정월 아시촌(阿尸村:함안)에 소경(小京)을 신설하고 가을 7월 육부 및 남방의 인구를 옮겨 도시의 모양을 갖추었다. 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秋七月 徙六部及南地人戶 充實之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법흥왕(法興王) 19년(A.D 532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비 및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 항복하니 왕은 예를 다하여 대접하고 상등의 위를 제수하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진흥왕(眞興王) 23년(A.D 562년) 가을 9월 가야가 배반하니 왕은 이사부를 시켜 가야를 토벌하고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앞질러 전단문에 들어가 백기를 꽂으니 온 성중이 겁내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군사를 끌고 들이닥치므로 일시에 다 항복하였다.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조하면, 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한 해는 A.D 532년이고, A.D 562년에 멸망한 가야는 금관가야가 아니고 고령가야이다. 가락국기에는 금관가야의 존속기간이 490년이라는 설과 520년이라는 설 둘 다 적혀 있으나, A.D 532년에 멸망하고 존속기간이 490년인 나라는 금관가야이고, A.D 562년에 멸망하고 존속기간이 520년인 나라는 고령가야이다.
금관가야 역년 490년은 초기 금관가야 역년 + 백제, 고구려(임나연정) 세력권에 들어간 시기 + 후기 금관가야 역년을 합친 것으로 이는 금관가야 역년을 미화한 것이다. 그리고 고령가야 역년 520년은 초기 고령가야 역년 + 백제, 고구려(임나연정) 세력권에 들어간 시기 + 후기 고령가야 역년을 합친 것이다.
또 가락국기에 적혀 있는 금관가야의 10대 왕계는 후손들이 전 금관가야 왕계와 후 금관가야 왕계를 짜깁기 하여 미화한 것이고, 삼국사기지리지에 적혀 있는 고령가야의 왕계 즉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모두 16세 520년도 역시 후손들이 전 고령가야 왕계와 후 고령가야 왕계를 짜깁기 하여 미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