蓋鹵王本紀 13년간 공백
三國史記 百濟本紀를 보면 蓋鹵王 本紀는 14년조부터 시작되고 있다. 즉 蓋鹵王이 즉위하고부터 만 13년간 本紀 내용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간혹 즉위 1-2년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궁중 내 사정으로 전왕이 죽은지 2년이나 3년째 되는 해에 신왕이 즉위하면서 공백기를 숨기기 위하여 즉위시기를 전왕이 죽은 해로 소급하면서 실제로는 즉위 원년이지만 본기상으로는 즉위 2년이나 3년으로 적혀 있는 경우이다.
개로왕 본기는 왜 14년조부터 시작되고 있을까?
三國史記에서 本紀의 공백이 있는 경우는 2가지이다. 하나는 궁중 사정으로 왕위의 공백기가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를 지은 후 강대국 金나라나 中國王朝를 의식하여 본기 내용 중 일부를 삭제한 경우이다.
蓋鹵王 本紀의 만 13년 공백기는 어느 것에 해당될까?
먼저 왕위 공백 가능성을 살펴본다.
개로왕 즉위 직전 본기 내용과 개로왕 본기의 앞 부분을 살펴본다.
「비유왕 29년(A.D 455년) 봄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에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해지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二十九年 春三月 王獵於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개로왕 14년(468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개로왕 15년(469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戍之」
毗有王 29년조는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이 문구에 나오는 사냥은 동족끼리 싸우는 경우에 사용한 용어이다. 그리고 黑龍은 북쪽에 있는 侯王이라는 뜻으로 遼西分國의 侯王을 지칭한 것이다. 이 문구의 뜻은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한강에서 반란군을 토벌하였고, 가을 9월에는 遼西分國의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본국으로 와서 반란을 진압했으나 그 와중에 毗有王이 죽었다는 뜻이다. 비유왕 직전은 久尒辛王이고, 구이신왕 이전은 腆支王이다. 둘다 온조백제계 왕이지만 비유왕은 구태백제계 왕이다. 그 때까지 백제지역에는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공존하다가 久尒辛王을 끝으로 온조백제 대를 끊어 버리고 한반도 백제지역을 仇台百濟가 단독으로 통치하였다. 따라서 이 반란은 溫祚百濟의 代를 끊어 버린데 분노한 溫祚百濟系가 반란을 일으켜 仇台百濟系 王인 부여씨 毗有王을 죽인 것이다.
毗有王 뒤 즉위한 蓋鹵王 역시 부여씨(구태백제) 왕이므로, 구태백제계인 遼西分國 侯王이 출동하여 毗有王 사망 후 蓋鹵王을 즉위시킨 이상 왕위 공백기는 생길 수 없다. 따라서 개로왕 초기 만 13년간의 공백기는 왕위공백기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개로왕 본기 14년간의 공백기는 삼국사기를 지은 후 金나라나 중국왕조를 의식하여 개로왕 본기 앞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중국의 사서인 宋書를 보면 개로왕은 A.D 458년 이전부터 이미 백제 장군들을 宋에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명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정로장군 여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여예를 보국장군에, 룡양장군 목금 여작을 룡양장군에, 녕삭장군 여류 미귀를 녕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여루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二年 慶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 行征虜將軍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 餘爵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 麋貴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 並為建武將軍」宋書 百濟傳 [註 위 문구 중에 "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이전에 발령받아 재직 중인데 백제국이 지방장관을 3년마다 한번씩 교체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이때 다시 재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 458년은 개로왕 4년이므로 위에 나오는 장군들 일부는 이미 개로왕 원년에 송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 표문은 백제왕이 임명한 그대로 송 황제도 임명하라는 백제왕의 통보서 성격을 띈 표문이다. 송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송나라의 관작을 백제왕이 마음대로 미리 수여하고 송 황제보고 그대로 관작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되는데, 그런데도 송 황제는 백제왕이 요청한 그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이때 겸직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은 여씨 성을 가진 백제의 왕족이거나 우씨, 목씨 등 성을 가진 백제의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직위는 제일 우두머리인 관군장군을 비롯하여 북위 정벌을 담당하는 정로장군 및 보국장군, 용양장군, 영삭장군, 건무장군 등이다.
그 후 송.백제 연합군은 북위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을 점령하였고, A.D 465년경에 백제는 그 곳에 조선태수, 광양태수 등을 두었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고달과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와 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를 보내니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後略」 南齊書 百濟傳 [註 혹자는 위 "比使宋朝" 문구를 고달, 양무, 회매 3인이 태시(註 A.D465-471년) 중에 송에 외교 사신으로 갔다고 해석하나, 위 문구는 위 3인이 송에 단순히 외교사신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고, 태시 중에 백제왕의 사자로 송에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서에는 고달, 양무가 송으로부터 장군이나 태수 등 작위를 받은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백제가 남제에 보낸 표문에 고달의 직위가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양무의 직위가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회매의 직위가 선위장군 겸 참군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A.D 463년경 백제와 송 연합군이 빼앗은 난하 서쪽 요서지방에 백제가 송 황제의 재가를 받음이 없이 단독으로 군현을 두고 고달, 양무, 회매를 태수 등에 임명하였음을 의미한다.]
위에서 보앗듯이 삼국사기에서 궁중변란에 관한 부분은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중국의 사서에 개로왕 초기에 일어난 일이 적혀 있는데도 삼국사기에 빠져 있는 것은 필화를 두려워 하여 이를 삭제한 것이다. 이 부분은 百濟가 중국의 遼西와 中國東海岸地方에 진출한 내용으로 中國王朝나 遼東王朝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기분나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