單單大嶺은 어디인가?
한나라는 B.C 108년에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다음해 高九黎 지역 일부를 점령하여 漢四郡을 설치하였는데, 單單大嶺 동쪽에는 樂浪郡 東部都尉를 두었다. 따라서 單單大嶺의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漢郡縣의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三國志 東沃沮傳을 살펴본다.
三國志 東沃沮傳에 의하면, 한나라는 單單大嶺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樂浪太守가 다스리고 동쪽은 東部都尉가 다스렸다.
「한나라는 토지가 너무 넓고 멀므로 단단대령 동쪽에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에 두고 단단대령 동쪽 7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 역시 현이 되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嶺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嶺東七縣 時沃沮亦皆爲懸」三國志 東沃沮傳
이 單單大嶺을 北鎭 醫巫閭山 산줄기로 보는 견해, 吉林 방면[吉林合達嶺]에서 撫順을 지나 千山山脈을 지나 만주 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산줄기로 보는 견해, 한반도 북반부에 있는 낭림산맥 또는 개마고원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單單大嶺의 위치를 살펴본다.
三國志 東沃沮傳에 의하면 樂浪郡이 單單大嶺 동.서쪽 지역에 설치되었으나, 한반도에는 A.D 44년까지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單單大嶺은 한반도 북반부에 있는 개마고원 또는 낭림산맥 산줄기가 아니다. 또 單單大嶺 동.서쪽 지역은 A.D 30년까지 樂浪郡의 관할에 속했으나, 北鎭 醫巫閭山 동.서쪽 지역은 B.C 75년에 樂浪郡의 관할에서 遼東郡의 관할로 바뀌었으므로, 북진 의무려산 산줄기도 單單大嶺이 아니다.
위 單單大嶺은 吉林 방면에서 撫順을 지나 千山山脈을 지나는 만주 중앙을 길게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산줄기이다.
東沃沮, 沃沮는 어디인가?
고대 九黎 무리는 해님과 달님을 숭배하여 자칭 桓因의 아들 桓雄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 칭하였고, 그 말을 한자로 적으면서 不黎→夫餘, 高黎→高麗 등으로 적었다. 고대에는 天, 不, 高, 玉은 모두 하늘나라 또는 천제를 상징하는 글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沃沮의 원래 글자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인 玉曹인데 뒤에 같은 발음의 玉阻로 바뀌었다가 다시 沃沮로 바뀌었다. 또 扶租의 원래 글자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인 不曹인데 뒤에 발음이 부조로 바뀌고 扶租로 적었다. 즉 沃沮나 扶租의 원래 의미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내려 온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나 고려와 같은 의미이다.
朝鮮上古史에서 申采浩님은 "옥저"가 만주어의 "와지" 즉 산림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海城縣 本古南沃沮國界"라는 盛京通志 문구에서 보듯이 王儉朝鮮 때 남쪽 수도인 沈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沃沮라 부른 것으로 보아 옥저는 산림이라는 뜻이 아니다.
古記에는 왕검조선 때 남쪽에 있는 수도인 阿斯達(심양 방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南沃沮 또는 沃沮로, 북쪽에 있는 수도인 白岳山阿斯達(장춘 방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北沃沮로, 함경도 지방이 東沃沮로 각 적혀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함경도 지방이 東沃沮 또는 南沃沮로 적혀 있다.
三國志에는 함경도 지방이 東沃沮로 적혀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三國志 東沃沮傳에는 만주 요녕 지방의 沃沮 역사와 함경도 지방의 東沃沮 역사가 함께 적혀 있다.
삼국지를 지은 陳壽가 만주 遼寧 지방의 沃沮 역사와 함경도 지방의 東沃沮 역사를 東沃沮傳에 함께 적은 것은, 만주 遼寧 지방에 거주하던 무리가 함경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이주한 곳에서도 만주 遼寧 지방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陳壽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우리민족의 영역을 韓半島로 국한시키려고 고의로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였는지 모르지만, 만주 遼寧 지방의 沃沮 역사와 함경도 지방의 東沃沮 역사를 東沃沮傳에 함께 적으므로써, 후세의 일부 사학자는 착각을 일으켜 漢郡縣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三國志 東沃沮傳에 적혀 있는 문구를 살펴본다.
「漢 초 燕의 망명객 衛滿이 조선왕이 되었을 때 옥저는 다 그에게 복속하였다. 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服屬焉」
「漢 武帝 원봉 2년(B.C 109년)에 위만(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右渠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하였다. 漢武帝 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沃沮城을 현도군으로 하였는데 나중에 夷貊이 침략하므로 郡을 句麗 서북으로 옮겼다.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지금 소위 玄菟古府라는 곳이다. 옥저는 다시 樂浪郡에 속하게 되었다. 今所謂玄菟古府是也 沃沮還屬樂郞」
「한은 땅이 너무 크고 넓어서 단단대령 동쪽은 東部都尉를 두어 불내성에 치소를 두고 嶺東7縣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 때 옥저는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嶺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嶺東七懸 時沃沮亦皆爲縣」
「후한 건무 6년(A.D 30년)에 지방 군의 도위를 철파할 때 동부도위를 파하고 그 현의 渠帥를 모두 縣侯로 삼았다. 不耐, 華麗, 沃沮 등은 모두 侯國이 되었다. 夷狄들이 다시 싸웠다. 建武六年(A.D30년) 省邊郡都尉 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夷狄更相攻伐」
위에 적혀 있는 문구는 만주 遼寧 지방의 沃沮 역사이다.
「북쪽은 읍루와 부여에, 남쪽은 예맥에 접하였다. 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
「오직 不耐 濊侯만이 아직도 功曹, 主簿 등 여러 曹를 두고 있고 모두 濊民을 쓰고 있다.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 皆濊民作之」
「옥저 여러 읍락의 거수는 三老라고 지칭하는데 옛날의 縣國 제도이다.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나라가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눌리어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 하였다. 國小 迫於大國之間 遂臣屬句麗」
「호수는 5천이었다. 戶五千」
위에 적혀 있는 문구는 함경도 지방의 동옥저 역사이다. 위 문구에 의하면 동옥저 주민들도 濊民이었다.
東沃沮는 뒤에 고구려에 정복되었다.
「태조대왕(太祖大王) 4년(A.C 56년) 가을 7월 동옥저를 공격하여 토지를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국가를 넓혀 동으로 창해(註 동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註 청천강)에 이르렀다.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삼국지에 의하면 동옥저는 토지가 비옥하고 농산물이 특히 잘 되었고 해산물도 풍부하였는데, 태조대왕 때 고구려에 복속하고부터 고구려에 대하여 조세로 貂(돈피), 布와 漁, 鹽 등 해산물을 공급하였다. 주민들의 성격은 강직하고 용맹하여 步戰에 능하였으며, 음식, 거처, 의복 예절이 고구려와 같았는데, 고구려의 豫壻制(데릴사위제)와 같이 동옥저에는 豫婦制(밑며느리제)가 있었다.
濊, 嶺東濊는 어디인가?
삼국지는 만주의 부여 무리를 직업별로 구분하여 濊(농어업족), 貊(사냥족), 胡(유목족)로 나누고, 농업과 사냥에 종사한 요녕지역의 부여 무리를 濊貊으로 적거나 직업별로 구분하지 않고 합쳐서 濊로 적었다.
三國志 濊傳에는 만주 遼寧 지역의 濊 역사와 한반도의 濊 역사가 함께 적혀 있다. 삼국지 예전에 적혀 있는 한반도의 濊 지역은 漢水 이북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지방과 함경도, 강원도 지방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濊 지역 중 嶺東濊라 부른 지역은 함경도 지방과 강원도 지방이다.
嶺東濊는 單單大嶺 동쪽에 거주한 濊 무리라는 뜻이다. 삼국지 예전에 나오는 嶺東濊에 관한 내용 중 일부는 吉林에서 撫順을 지나 千山山脈을 지나 西韓灣에 이르는 만주 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單單大嶺 동쪽에 거주한 濊 무리에 관한 내용이고, 일부는 함경도 지방과 강원도 지방에 거주한 예 무리에 관한 내용이다.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濊傳에 만주 중앙에 있는 單單大嶺(吉林合達嶺과 千山山脈을 연결한 산줄기)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개마고원 또는 낭림산맥도 單單大嶺인듯이 적어 놓았다. 따라서 삼국지 예전에 적혀 있는 嶺東濊 문구를 해석할 때는 전후 문구를 살펴 보아 단단대령이 길림합달령과 천산산맥을 연결한 산줄기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개마고원 또는 낭림산맥을 가리키는지 판단해야 한다.
嶺東濊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濊傳과 東沃沮傳에 모두 적혀 있다.
三國志 濊傳에
적혀 있는 문구를 살펴본다.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이를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조선후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准僭號稱王」
「진승 등이 일어나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사람 수만 구가 난을 피하여 조선으로 왔다. 陳勝等起 天下叛 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연나라 사람 위만이 머리에 상투를 틀고 동이족의 복장을 하고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 燕人衛滿魋結夷服復來王之」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두었다.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單單大嶺 서쪽은 樂浪에 속하고 嶺 동쪽의 7현은 都尉가 주관하였다. 모두 濊를 民으로 삼았다. 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 以東七懸都尉主之 皆以濊爲民」
「후에 도위를 없애고 그 거수를 봉하여 후(侯)로 삼았다. 後省都尉 其渠帥爲侯」
위에 적혀 있는 문구는 만주 요녕지방 濊 무리의 역사이다.
「후한 말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漢末更屬句麗」
「정시 6년(A.D 245년)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宮遵이 嶺東濊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不耐侯 등이 縣邑을 들어 항복하였다. 그 8년(A.D 247년)에 황제에게 조공하므로 다시 조칙을 내려 不耐濊王에 봉하였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註 이 무렵 동천왕이 남옥저(동옥저:함경도 방면)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는 함경남도 남부 일부 지방과 강원도 지방만 정벌하였고 그 북쪽은 점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호(戶) 수는 2만이었다. 戶二萬」三國志 濊傳 [註 戶 2만은 한반도에 거주한 전체 濊 무리의 총 戶數이다.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동옥저(함경도 지방)에 거주한 濊 무리의 戶數가 5천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한반도에 거주한 예 무리 총 2만호 중에서 동옥저에 거주한 예 무리 5천호를 빼면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지방에 거주한 예 무리는 대략 1만5천호이다.]
위에 적혀 있는 문구는 한반도에 거주한 濊 무리의 역사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한반도에 거주한 濊 무리는 농업을 주로 하였고, 麻織, 養蠶을 할 줄 알았으며, 별을 관측하여 凶豊을 점치고, 매년 10월에는 舞天이라는 祭天大會를 열었다. 또 山川을 중시하여 산천에는 각기 部分이 있어 함부로 남의 영역에 침범치 못하였고, 호랑이(虎)를 神으로 받들고 邑落이 서로 침범하면 責禍라 하여 노예와 牛馬로써 물리었다.